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크 소시아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LA 다저스에서만 뛴 원클럽맨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사실 1992년 스토브리그 때 파드리스로 트레이드됐으나, 이듬해 시범경기 중에 우측 회전근 파열이라는 중상을 입고 방출된 뒤 코치로 다저스에 복귀하면서 본의 아니게 원클럽맨이 되었다. [[강기웅]], [[에가와 스구루]]와 비슷한 케이스.] 명감독의 선수 시절은 허접한 경우가 많은데, 다저스에서 허접한 포수였냐면 절대 아니다. 13시즌 동안 다저스에서만 뛰면서 1981년과 1988년 월드 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으며, 2번 올스타전에 출전한 명포수로 특히 수비와 게임콜이 돋보이는 포수였다. 타격에서도 포수치고는 나쁘지 않았고, 타율에 비해서 콘택트가 좋아서[* 통산 삼진 비율이 6.1%에 불과하다. 즉 삼진은 14타석 중 1번 밖에 당하지 않았고, 나머지 타석은 안타든지 아웃이든지 어떻게든 공에 방망이를 맞췄든지, 아니면 볼넷으로 출루했다는 얘기.] 2번타자로 출장하기도 했고, 그의 타석 커리어 하이였던 1985시즌에는 내셔널리그에서 출루율 2위였다.[* 이 시즌에 77볼넷-21삼진이라는 경이로운 볼삼비를 기록했다.] 또한 소시아는 커리어 통틀어 단 한 시즌도 삼진이 볼넷보다 많았던 적이 없다. 현시대 팬들에게 알기 쉽게 말하면 거의 [[야디어 몰리나]]급의 수비와 게임콜링, 존재감으로 다저스 팬들과 선수들에게 사랑받았던 포수. [[http://www.baseball-reference.com/players/s/sciosmi01.shtml|마이크 소시아의 현역시절 기록.]] 초년병이라 백업 포수였던 1981년에는 당시 팀 에이스였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의 전담포수로 출전했다. 발렌수엘라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스페인어도 따로 배웠다고. 그리고 1988년에는 주전 포수로서 오클랜드를 4승 1패로 꺾고 7년 만의 월드 시리즈 우승 과정에서 한 몫했다. 선수시절 두 차례 노히터를 캐치한 포수기도 했으며, 1988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4차전에서는 극적인 동점홈런을 치기도 했다. 부상 때문에 12년만 뛰고 은퇴하기는 했지만, 선수 시절 보여준 뛰어난 게임운영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은퇴 후 다저스에서 배터리 코치로 뛰면서 일찍부터 차기 다저스의 감독 후보로 주목받았다. ~~12년의 선수생활동안 얻은 두개의 절대반지는 덤~~ 원래는 박찬호가 있던 때부터 [[토미 라소다]] 은퇴 이후 차기 감독후보까지 거론되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다저스가 소시아 대신 1970~80년대 다저스를 빛냈던 유격수 출신의 빌 러셀을 감독으로 선임한다. 그리고 빌 러셀이 1998년 시즌에 성적 부진으로 짤리자 이번에는 소시아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했는데, 1999 시즌을 앞두고 새로 감독으로 임명된 사람은 뉴욕 메츠를 이끌었고 신시내티 레즈,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감독생활을 한 베테랑 [[데이비 존슨]]. 이 결정에 대한 반발이 많아지자 당시 단장인 케빈 말론은 이 결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히려 소시아를 해임했다. 그 전까지는 꾹 참고 코치로 지내던 소시아였지만, 해임에는 크게 분노하며 팀을 옮기기로 마음먹는다. 마침 [[테리 콜린스]] 감독 항명 사태가 터지면서 팀이 막장이 된 옆동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가 강력하게 러브콜을 보내자, 결심을 굳히고 에인절스의 감독으로 이동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